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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당시 한국의 대학 응용미술교육 상황은 전반적으로 교육시설, 기자재 등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교육과정, 지도방법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특히 2차 대학이었던 국민대학의 경우는 전공에 대한 불확실성과 학생들의 자신감 결여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조형학부 교수들은 대외적으로 조형학부의 인지도를 높임과 동시에 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자율적 창작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것이 곧 조형전이었다. 조형전은 발상에서 완성까지 학생이 자율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지도방법이었다. 발상에서 완성에 이르는 모든 창작 과정을 학생이 스스로 체험하지 않으면 독립된 디자이너 또는 공예가로서 성장하기 어렵다. 모든 학생이 학과별, 학년별로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공통(거시적)의 주제로 동시에 함께 작업하면서(협동), 각자 개인(미시적)의 과제에 몰입(개성)하는, 조형전을 위한 수업은 학생에게는 ‘함께 배우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교수에게는 자기 분석적으로 창의성을 개발하는 지도방 법을 요구했다. 교수와 학생이 일정기간 동안 지속적이고 계획적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조형전은 조형학부 교육목표의 집약된 표현과 다름없었다. 조형전은 1-4학년 전 학생이 참여하는 학생작품 전시회로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어느 대학도 따라하지 못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1976년 제 1회 조형전은 ‘한국인의 손’이라는 주제로 건축학과, 장식미술학과(공업디자인전공, 시각디자인전공),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도자공예전공, 금속공예전공)의 학생작품을 서울, 광주, 전주, 부산, 대구 5개 도시에 10월-11월, 총 30일 동안 전시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 디자인 교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축학과의 작품과 의상학과의 작품이 디자인 분야의 작품으로 전시되었다는 것은 아주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건축공학이 건축디자인으로, 의상학이 의상디자인(패션 디자인)으로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1) 제 1회 조형전의 슬로건은 ‘한국 유일의 조형학부’와 ‘한국 유일의 조형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형이라는 용어는 대중에게 아주 생소하게 받아들여져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당시 대학 전체가 적극적으로 조형전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학 안에서조차 조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아 1977년 제 2회 조형전 때에는 필자가 국민대학 신문의 사설에 조형학부의 특성을 해설하기도 했다.2) 전국 순회전은 1978년의 제 3회 조형전까지 매년 같은 형식으로 진행했다. 3년마다 한번씩 서울에서만 개최하기로 결정한 제 4회 조형전을 계기로 조형대학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전시회에 담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