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K Design Media Wiki:대문

K Design Media Wiki
Kdmw50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6월 15일 (일) 10:08 판 (역대 조형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의 교육 50년을 기념하고 기록하기 위한 KDMW(Kookmin Design Media Wiki)가 설치되었습니다.

교육50년

굿 디자인, 굿 디자이너

조형학부의 출범

한국 최초의 디자인 대학 —조형대학의 탄생과 발전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체제는 소수의[종합대학교 University와 다수의 단과대학 College으로 구성되었으며, 대학입시 전형도 1차와 2차로 구분해서 학생을 선발했기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에는 1차 대학은 일류 대학, 2차 대학은 이류 대학이라는 대학 서열의 사회적인 통념이 있었다. 국민대학은 해방 후 가장 먼저 생긴 사립대학이지만, 1980년 이전까지는 이러한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2차 단과대학이었다. 1973년 3월 새로 부임한 서임수 총장1)은 소규모 2차 단과대학으로는 대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우선 각 전공 분야에서 이미 잘 알려진 우수한 인재를 교수로 영입함과 동시에 특정한 학과를 중점 육성함으로써 대학의 지명도를 높이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발전계획 속에 생활미술학과(1971년 설립)와 장식미술학과(1973년 설립)특성화가 있었다. 1974년 장식미술학과에 초빙된 부수언 교수가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힘썼다. 부 교수는 그 때까지 생활미술학과와 장식미술학과뿐이던 체제를 조정하고 새로운 전공을 개설하고자 했는데 서 총장이 제때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서 총장은 1974년 토목공학과와 건축공학과를 설립하고, 같은 해에 당시 최고의 명성을 가졌던 공간건축 연구소의 건축가 김수근을 건축공학과 교수로 초빙한 후 1975년 이공계열인 건축공학과와 예능계열인 생활미술학과, 그리고 장식미술학과를 하나의 학부로 통합하여 ‘조형학부’라고 명명했다. 김수근 교수가 조형학부장, 부수언 교수가 학부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76년 일반계열 의상학과(1968년 설립)가 조형학부로 통합되었다. 당시 소규모 단과대학인 국민대학에서 계열이 다른 4개의 학과를 통합하여 조형학부를 만든 것은 국민대학 안에서도 획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1976년 제 1회 ‘조형전’을 개최하면서부터는 전국의 대학 디자인 교육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정도로 새로운 발상이었다. 이렇게 조형대학은 한국 최초의 디자인 대학으로 탄생했다.

1981년 한국 최초의 디자인 대학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대학들은 앞 다투어 단과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시작했다. 현재는 모두 4년제 종합대학과 2년제 전문대학 체제로 되어있지만, 당시로서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 일이 각 단과대학의 숙원사업이었다. 국민대학도 1980년 문교부(현재 교육부)에 종합대학 승격을 신청했으며, 그 속에 조형학부의 조형대학 승격 프로그램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980년 가을 문교부는 조형학부의 건축공학과는 공과대학으로, 의상학과는 가정학과로, 생활미술학과와 장식미술학과는 문과대학으로 편입시켜 발표함으로써 조형학부 설립 이전으로 상황을 되돌려 버리고 말았다. 이에 정범석 총장은 당시 조형대학의 조형이라는 용어가 문교부 담당자에게는 아주 생소한 개념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조형대학의 취지를 문교부에 건의하여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1981년 종합대학교로서 국민대학교, 단과대학으로 조형대학이 탄생되었다.

조형대학의 정체성은 디자인 대학College of Design이다. 전국 모든 대학의 획일적 명칭인 미술대학이 아니라, 디자인 관련 학과로만 구성해 특성화함으로써 성공한 사례이다. 조형대학이 선택한 명칭과 1970-1980년대를 통해 행한 교육내용 및 전시회는, 디자인이란, 미술을 응용하는 학문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자적인 조형 영역임을 실제 학생작품을 통해서 확실하게 지각시켰으며, 학생들에게도 장차 활동하게 될 디자인 전문분야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지방에는 우리 대학의 명칭을 본받은 조형대학, 디자인대학이 생겨났고, 그 때 이후 의상디자인, 공업디자인, 시각디자인의 명칭 등이 보편화 된 것은 모두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의 사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부터 배출된 조형대학 졸업생 중에는 현재 한국 디자인 산업계와 대학 디자인 교육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국민대학교 조형전
1970년대 당시 한국의 대학 응용미술교육 상황은 전반적으로 교육시설, 기자재 등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교육과정, 지도방법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특히 2차 대학이었던 국민대학의 경우는 전공에 대한 불확실성과 학생들의 자신감 결여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조형학부 교수들은 대외적으로 조형학부의 인지도를 높임과 동시에 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자율적 창작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것이 곧 조형전이었다. 조형전은 발상에서 완성까지 학생이 자율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지도방법이었다. 발상에서 완성에 이르는 모든 창작 과정을 학생이 스스로 체험하지 않으면 독립된 디자이너 또는 공예가로서 성장하기 어렵다. 모든 학생이 학과별, 학년별로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공통(거시적)의 주제로 동시에 함께 작업하면서(협동), 각자 개인(미시적)의 과제에 몰입(개성)하는, 조형전을 위한 수업은 학생에게는 ‘함께 배우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교수에게는 자기 분석적으로 창의성을 개발하는 지도방 법을 요구했다. 교수와 학생이 일정기간 동안 지속적이고 계획적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조형전은 조형학부 교육목표의 집약된 표현과 다름없었다. 조형전은 1-4학년 전 학생이 참여하는 학생작품 전시회로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어느 대학도 따라하지 못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1976년 제 1회 조형전은 ‘한국인의 손’이라는 주제로 건축학과, 장식미술학과(공업디자인전공, 시각디자인전공),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도자공예전공, 금속공예전공)의 학생작품을 서울, 광주, 전주, 부산, 대구 5개 도시에 10월-11월, 총 30일 동안 전시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 디자인 교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축학과의 작품과 의상학과의 작품이 디자인 분야의 작품으로 전시되었다는 것은 아주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건축공학이 건축디자인으로, 의상학이 의상디자인(패션 디자인)으로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1) 제 1회 조형전의 슬로건은 ‘한국 유일의 조형학부’와 ‘한국 유일의 조형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형이라는 용어는 대중에게 아주 생소하게 받아들여져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당시 대학 전체가 적극적으로 조형전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학 안에서조차 조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아 1977년 제 2회 조형전 때에는 필자가 국민대학 신문의 사설에 조형학부의 특성을 해설하기도 했다.2) 전국 순회전은 1978년의 제 3회 조형전까지 매년 같은 형식으로 진행했다. 3년마다 한번씩 서울에서만 개최하기로 결정한 제 4회 조형전을 계기로 조형대학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전시회에 담아 나갔다.

조형대학의 체계와 학풍
1970년대 당시 전국 대부분의 대학교University와 대학College에는 모두 미술대학College of Fine Art이란 명칭 속에 서양화과, 동양화과, 공예미술학과, 응용미술학과, 생활미술학과 등이 혼재되어 있어 디자인과 공예는 항상 미술의 한 분야이거나 미술을 응용하는 분야로 인식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기술혁신을 통해서 사회와 문화가 빠르게 변하는 가운데, 특히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었어도 우리나라 디자인 관련 대학들은 인습적인 미술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978년까지 3년 동안 전국 순회 조형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조형학부는 1981년 건축학과, 공업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학과, 공예미술학과(도자공예전공, 금속공예전공), 의상학과의 5개 전공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조형대학으로 승격했다. 종합대학 승격 당시 디자인 대학의 명칭을 사용하려 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생소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대학의 영어 명칭을 ‘College of Architecture and Design’으로 표기함으로써 우리 대학 졸업생들이 외국유학 갈 때에 국내 어느 대학보다 더 디자인 전문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의 정식 명칭에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1983년 장식미술학과를 공업디자인학과와 시각디자인학과로 분리하며 디자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획기적인 것으로서 오늘날 각 대학 의 공업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학과라는 명칭의 효시가 되었다. 1990년부터 디자인계는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전자 환경이 21세기 디자인의 중요한 전제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개발 중심적이고, 시장지향적인 디자인 개발에 대한 세계적인 문제의식에 부응해서 조형대학의 디자인 교육에서는 21세기의 미래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디자인 교육에 반영해 왔다. 그 결과 대학입시에서 조형대학 학생들의 수준이 아주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전공인 디자인 분야에 대한 관심도 다양해 졌고, 그 의욕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되었다. “입 학하기 전에 들은 소문보다 들어와 보니 더 좋은 대학이 곧 조형대학”이라고 많은 재학생들이 한 결 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이것은 우리대학의 자랑임과 동시에 앞으로 더욱 좋은 대 학으로 발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 최초의 디자인 대학으로서 조형대학은 중요하지 않다. 한국 최고의 디자인 대학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 책임은 현재의 교수들에 달려 있다. 미래의 조형대학도 역시 학생을 잘 가르치는 데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을 열심히 가르쳐 역량 있는 디자이너로 발전하게 하는 일 외에 대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특히 디자인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1976년 교수들이 밤낮으로 열심히 가르친 결과인 ‘조형전’으로부터 시작된 조형대학의 발전이 이것을 증명한다. 1970년대의 상 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면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대학 교육에서 학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대전제이다. 1976년 이후 지금까지 이어온 조형대학의 기풍은 ‘학생을 잘 가르치는 대학’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형대학의 장래는 교수들의 열정적이고도 새로운 ‘학생 가르치기’ 프로그램 개발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정시화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

조형이라는 용어의 발단: Gestalt=Design=조형造形

조형造形이라는 용어는 독어의 게슈탈트Gestalt, Gestaltung의 한자漢字 번역으로서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슈탈트는 영어의 형태Form, Shape라는 뜻이지만 실제 내용은 전체Wholeness, 체제화Configuration, 구성Organization 등을 의미한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철학이 반영된 실제 명칭은 바이마르 게슈탈트 대학Hochschule fuer Gestaltungin Weimar으로 영어로는 디자인Design 대학으로 번역되며, 일본과 한국에서는 조형造形 대학으로 번역되고 있다. 서양의 Fine Art를 일본이 먼저 순수미술이라고 한자로 번역하여 오늘날 한자문화권 에서 관용적으로 통용되고 있듯이 동일한 맥락에서 독일어의 게슈탈트는 조형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영어권에서는 Design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조형대학은 곧 디자인대학을 가리키며, 조형예술대학은 미술과 공예, 디자인이 종합되어 있는 과거의 미술대학의 명칭을 오늘날의 동향에 맞게 변경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1975년 국민대학 조형학부의 설립과 1981년 조형대학College of Architecture And Design의 출발은 한국에서 대학 디자인교육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0년대 산업화와 디자인

조형학부 출범 당시의 한국 디자인계 —1975-1985년


조형학부가 교육을 시작한 1970년대는 60년대에 시작된 공업근대화를 위한 지속적인 경제개발 계획과 각종 무역제도의 정비, 수출 지원체제의 확립 등으로 우리나라의 무역과 경제가 본격적인 도약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의류, 가발 등의 초창기 수출 주류품목이 가전제품 등과 같은 공산품 위주로 바뀌었고, 또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핵가족화는 아파트 붐과 함께 가전제품의 폭발적 수요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산업적 배경에서 우리나라 디자인산업의 초창기는 금성사(현, LG전자), 삼성전자, 대한전선(후에 대우전자에 흡수됨)의 가전업계 3사가 선도하였다.

초창기 산업디자인은 가전업계가 선도
1958년 한국 최초의 산업디자이너를 공개 채용한 금성사는 1960년 공업의장과를 설치하여 1973년 공업의장실로 승격하고 1983년에는 디자인 종합연구소를 설립함으로써 업무의 독자성을 갖게 하고 1991년 디자인 종합연구소장을 임원으로 임명했다. 삼성전자는 1971년 산업디자이너를 공개 채용함으로써 본격적인 디자인 업무를 시작하였고 1973년 디자인 부서가 기술개발실로 소속되면서 1974년부터 해외활동을 포함한 대외적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1년 설립된 대한전선은 각 공장 개발부에 분산 소속되어 있던 디자이너들을 모아 1973년 의장개발과를 발족시키면서 본격적 디자인 업무를 시작하였고, 주력 제품인 TV에 수직형, 포터블형 등 참신한 디자인을 선보여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자동차디자인 시대
정부에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일환으로 1973년 국산 자동차의 생산 정책을 공표하였다. 현대자동차는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의 이탈디자인Italdesign사와 자동차 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고유 모델 생산에 착수했으며,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 모델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 1975년에 출시된 ‘포니’와 ‘포니쿠페’가 차체, 디자인, 성능, 경제성 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의 고유 모델 승용차 생산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한국의 자동차 산업 기술 수준을 조립 기술 단계에서 제조 기술 단계로 한 단계 발전시키면서 향후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밝은 미래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종합대학 승격으로 조형학부가 조형대학이 되어 본격적으로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한 1980년대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의 경쟁 체제로 승용차가 대중화되어 소형차 중심의 마이 카 시대가 시작된 시기로서 현대는 ‘포니’에 이어 ‘엑셀’과 ‘프레스토’를, 기아는 ‘프라이드’, 대우는 ‘르망’을 전 세계에 진출시키는 등 국내 자동차 산업이 대량생산 과 국제화로 급격히 성장한 시기였다.

진흥기관과 전문단체
정부는 ‘진흥’을, 기업은 ‘경영’을 한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정부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흥기관을 설립하게 되는데, 1965년에 발족한 사단법인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와 한국포장기술협회로 이들은 1970년 설립되는 재단법인 한국디자인포장센터KDPC: Korean Design & Packaging Center의 모체가 된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1991년 한국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KIDP: 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Design & Packaging으로, 1997년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KIDP: Korea Institute of Design Promotion으로, 2001년 한국디자인진흥원KIDP: Korea Institute of Design Promotion으로 개편)는 디자인의 향상과 포장기술의 개선을 위하여 연구 개발 및 지도, 진흥, 포장재 생산과 공급을 주요 사업으로 했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 제고, 새로운 정보의 수집과 보급, 실태조사, 교육연수, 전문서적 발간, 전시사업 등의 진흥사업이 초창기 한국 디자인계에 기여한 공로라 하겠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디자인 전문 단체인 한국 인더스트리얼디자이너회1)가 9명의 산업디자이너들에 의해 창립되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년 ‘창립전’, ‘전기·전자전’, ‘어린이의 세계’, ‘여성을 위한 디자인’, ‘조명전’, ‘산업도자전’ ‘레저전’, ‘어린이의 환경’을 주제로 회원전을 통한 작품발표와 한국공업디자인상 공모전 그리고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KSID 하계대학 등을 통해 굿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다.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와 디자인 공모전들
1966년부터 개최된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1977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로 명칭 변경)는 미술이 경제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모하고, 미술계와 산업계를 연결시켜 디자인 개선을 촉진시키고자 상공부에서 주최한 디자인 전반에 걸친 최초의 관전官展이다. ‘미술 수출’이라는 슬로건으로 수출 상품의 고급화와 다변화를 통한 국제 경쟁력 강화를 추진하던 정부는 이 전람회를 개최함으로써 미술계와 산업계를 연결시켜 수출 및 국내 디자인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고, 디자인 분야는 이를 계기로 전문화되면서 디자인 학계와 실무에서 활동할 전문디자이너들을 배출하는 등용문이 마련되었다. 1978년에는 제1회 한국공업디자인상 공모전이 한국 인더스트리얼디자이너협회KSID주최로 개최되었는데, 이는 디자인 전문단체가 주최한 최초의 산업디자인 공모전으로 ‘소형 자동 차’, ‘스트리트 퍼니처’, ‘어린이 부문’, ‘전기 전자제품’의 주제별로 공모하여 입선 이상의 수상 작품들은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전시관에서 전시되었다. 1983년에는 금성사가 금성 디자 인 공모전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격년제로 시행되었고 1990년 ICSID의 공인을 받아 1991년부터 금성 국제디자인 공모전으로 승격하여 격년마다 실시되었다.

언론과 사회의 디자인 관심
디자인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면서 각종 정보의 체계화가 절실히 요구되던 1976년 월간 잡지인 ‘디자인’이 창간되어 국내 디자인의 정보 수집과 확산에 기여하고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77년 ‘꾸밈’, 80년 ‘포름’, 87년 ‘시각디자인’, 88년 ‘월간 공예’, ‘디자인 저널’이 창간되었고, 이어서 ‘디자인 비즈니스’, ‘코스마’, ‘디자인 네트’ 등이 뒤를 이었다. 1983년 KBS텔레비전이 방영한 6부작 기획물 ‘세계는 디자인 혁명시대’는 매스컴의 위력을 실감시키며 큰 효과를 파급시켰다. 이 기획은 매스컴의 입장에서 일반인들에게 디자인의 윤곽만을 소개한 것에 불과했지만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시키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5년에는 국내 공산품 중에서 디자인의 우수성을 인증하기 위하여 ‘GD마크’를 부여하는 굿 디자인 시상제도를 제정하여 현재까지 매년 시행하고 있다. GD상품 선정제의 실시로 산업계에는 디자인 개발 촉진을 위한 동기 부여를, 소비자들에게는 상품 선택의 안목을 높임으로써 산업의 발전과 생활의 질적 향상을 함께 도모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또 1986년과 19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와 서울 올림픽은 그 준비 과정에서부터 우리나라 디자인 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그것은 주최국으로서 디자인 수준이 급상승되었기 때문이다.

조형대학과 산업체
초창기의 우리나라 산업디자인은 가전업체가 주도했지만, 그 당시 가전 3사의 제품은 종류와 수요가 매우 적었고 제조 기술 수준도 낮아 디자이너 채용도 소수에 그쳤기 때문에 후발 대학인 우리 졸업생들에게 산업체 취업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때 새롭게 떠오르는 자동차산업은 우리 대학의 졸업생들에게는 블루 오션이었다. 80년대 초 조형대학에서는 기존의 산업미술학과를 공업디자인학과와 시각디자인학과로 분리하여 전문화하였으며, 특히 공업디자인학과에서는 가장 먼저 ‘자동차 디자인’ 과목을 4학년 1,2학기에 개설하고 집중한 것이 주효해, 자사의 우수디자이너 확보를 위한 자동차 제조회사들의 경쟁적 지원 속에 많은 졸업생들을 동 분야의 우수디자이너로 진출시킬 수 있었다. 1979년부터, 조형대학의 학장이었던 건축가 김수근 교수의 공간연구소에 ‘ID파트’를 설치하고 5인의 산업디자이너들과 함께 ‘건축과 산업디자인의 콜라보레이션’을 5년간 진행한 과정과 결과를 토대로 80년대 초 ‘환경디자인론’, ‘환경디자인Ⅰ’, ‘환경디자인Ⅱ’를 개설함으로써 1983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부터 ‘공업디자인부’가 ‘제품 및 환경디자인부’로 변경되는 디자인 산업의 변화에 선도적으로 적응하였다. 1983년 조형대학에서는 기존의 산업미술학과를 공업디자인학과와 시각디자인학과로 분리 개편하면서 국내 최초로 대학의 학과 명칭에 ‘디자인’이라는 외래어 사용이 허가되었다. 이를 계기로 ‘CADComputer Aided Design’, ‘산학협동 프로그램’등 미래지향적 교과과정을 개설함으로써 1984년 당시 문교부로부터 이 분야의 특성학과로 지정되었고, 이러한 교육의 과정과 결과를 모든 재학생들의 포트폴리오Portfolio에 수록하여 산업체 입사시험 면접 시 활용한 것도 성공요인의 하나였다. 이렇게 7, 80년대의 조형관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조형학부가 출범하고 이듬해인 1976년 3월 교수로 임용되어 합류한 후 지난 2012년 8월에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36년 6개월을 함께하는 동안에도 그 불빛은 여전했다.
김철수
공업디자인학과 명예교수

종합적 영역의 디자인교육

통합적 가치의 시대와 디자인 교육

광복 후 근대 교육을 시작하고도, 예술 교육은 일제의 것을 준용하고 있었다. 한동안 친일예술가가 회자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미술과 디자인이 혼동되었고 건축은 기술공학 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건축이 끼어든 것은 건축의 예술지향이라는 목적성을 드러낸 것이다. 건축이 예술인가라는 논의는 요즈음 들어 많이 수정되었지만, 디자인과의 콜라보레이션은 이미 바우하우스에서부터 익숙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닫힌 독자적 전공의 구습으로 인해 열린 총합적 시스템의 구현 은 멀어 보였다. 1970년대 산업과 디자인이 융합을 도모할 즈음, 건축은 설계 직능을 특화하고 있었다. 공학기술과 디자인 기량을 구분하며 건축공학과와 건축학과가 교육 목표를 달리 하기 시작했다. 한국 건축교육사에서 후발 주자인 국민대학교 조형학부 건축학과의 가속력은 건축공학과와 차별되는 시스템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 새 그릇에 설계중심교육을 담았다. 이는 당연히 조형학부의 이웃 전공들과의 교합 구조에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문화가 그러했듯이, 부문의 통합성이 지배적인 수단이었다. 기업도 CI로 경영의 개념을 표시하며 이미지를 앞세웠고, 디자인과 생산이 결합된 시스템이 산업 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그즈음 조형대학이 어떻게 구조와 내용과 형식의 통합성을 이루는가 돌이켜본다.

통합적 연구-교육 시스템 통합적 시스템이라는 것은 교육으로 구시求是하기 위한 - 미학적 집합을 - 단단한 조직으로 - 병치 구조를 만들되 - 사슬처럼 연계되는 겹침에서 - 미묘한 경쟁 아래 - 상대성을 발 휘하며 - 꼴라쥐의 모습에서 나타나지만 - 그 합목적성은 총합적 효과에 이르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개체적 우월성의 집합으로 통합적 수월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전 공보다는 대학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80년 조형대학은 김수근 교수를 초대 연구소장으로 환경디자인연구소를 설치하는데 연구와 실천을 동조시킬 체계였다. 당시 대학에서 연구 프로젝트의 기회가 많지 않았고, 대학 에서도 독려하는 태세가 아니었다. 처음 서울시에 연구용역의 계약을 하는데 이사장의 직인이 필요했다. 재단 사무처에 직인사용을 의뢰했지만 그런 것은 해본 적도 없고 안 된단다. 지금처럼 산학협력단이 연구를 지원하고 대학이 연구용역을 독려하는 시스템은 상상도 못했다. 할 수 없이 연구소가 계약 당사자가 되려고 독자적인 사업자 등록을 성북세무서에 신 청했는데 이도 반려되었다. 한 기관(대학교) 안에 복수의 사업자 번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곤란에 처했는데 꼭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경영대학 모교수의 협조로 다시 추진 하니 사업자 번호가 나왔다. 1983년 연구소가 독자적인 계약자가 되니 살림이 훨씬 편해졌고, 연구 프로젝트도 줄지어 들어왔다. 초기의 프로젝트는 주로 도시설계와 건축기획이었고 다른 전공들의 연구 프로젝 트도 이 사업자등록 덕분에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조형대학 안의 커뮤니티도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연구비의 일부도 적립해 갔고, 연구저널 《조형논총》도 연구소가 편 집했으며, 디자인 심포지엄도 여러 번 가졌다. 정년퇴임 교수의 송별도 연구소가 주관했다. 조형대학 야외스케치 행사에는 교수들이 각자 음식을 만들어와 서로 권하며 함께 했다. 조형대학 안에서 전공 사이에 견제와 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런 가족 같은 교수 사회는 어디에서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조형대학의 교수사회는 그런 분위기만이 아니라, 조형전이라는 의기투합도 이루어냈다. 식구들이 한 집의 공간을 쓴다는 것도 중요하다. 자못 공간이 집단의 사회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1978년 건립한 중앙도서관이 지금의 성곡도서관으로 이전하고, 1993년 현재의 조형관을 증개축하여 1994년 조형관으로 모두 들어갔다. 1998년에는 3차 증축을 하여 공간을 안정시켰다. 조형관은 원래 도서관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실습-교실로서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나, 비교적 적절한 밀도로 대학 살림을 꾸려갔다.
김수근의 존재감과 포스트 김수근
김수근 교수는 1975년 우리 학교에 부임하기 이전부터 새로운 디자인 교육 체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1950년 서울대학 건축공학과에 입학하나, 곧 해방과 전후의 교육 환경에 실망한다. 1952년 서울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에 들어가 1954년 도쿄예술대학에서 예술-건축학으로 자신의 성장 프로그램을 짠다. 1960년에는 도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이수한다. 1960년 귀국하여 김수근건축사무소를 시작하면서 대학 교육에 참여한다. 1961년 홍익대학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 1972년 건국대학에도 잠시 적을 두었으나 내외의 사정으로 거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과 디자인과 건축의 합일合一을 공간 그룹에서 이루고 있었다. 월간 《공간》 창간(1966), ‘공간 사랑’의 예술 발굴, ‘인간환경연구소’(1969)의 전통과 인문학적 접근 등은 그의 문화의 범주를 알게 한다. 1979년에는 공간연구소에 공업디자인 부문이 영입된다. 여러 저널이 그를 르네상스 맨이라 말했는데, 예술과 문화의 종합적 구조 에서 일하고 있는 바를 본 것이다. 조형대학의 교육 체제는 여러 방향에서 가치가 이야기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연대적 프로그램이다. 김수근의 ‘공간’ 조직에는 싱크 탱크가 있어서 그의 문화적 이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이 시대사회적 이상을 얹어 총합적 문예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디자인 교육에 대한 이상은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Bauhaus, Dessau나, 프랭크 로이드 라 이트의 탈리어신 웨스트Taliesin West, Scottsdale처럼 도제적 구조에서 인적 종묘種苗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뜻은 1982년 공간의 원서동 시대를 거두고, 파주 홍릉으로 옮 겼을 때 가능성이 있었다. 말하자면 작업과 생활과 도제적 조직이 이루는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1986년 여름 김수근 교수는 떠났다. 그동안 김수근 교수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김수근 효과’였다. 한국의 큰 별을 떠나보낸 것은 아쉽기 짝이 없지만, 이제 포스트-김수근 대학에서 도 ‘항상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서있을 자기自己’를 찾는 수밖에 없다. 어떤 교수의 기념적 존재감이라 하더라도, 그의 조상彫像을 두 개나 한 캠퍼스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김수근이 유 일할 것이다. 1996년 별리 10주기에 조형대학 로비에 만든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2009년 건축대학이 독립하면서 설치한 것인데 모두 금누리 교수가 만들었다.

공합적共合的 교육 시스템 조형전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조형전은 홍보 효과와 종합 교육 시스템으로 돋보였다. 조형전의 즐거움은 그 해의 주제를 논의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의지와 생활문화 의 창조’(1981), ‘조형 2000’(1987), ‘디자인 시대정신’(1990) 등이 그렇다. 아마 전시 주제를 실사구시로 해보기 시작한 것은 ‘Green 21’(1995)부터일 게다. 윤호섭 교수의 리드 도 튼실했지만 표현과 매체도 다양해졌다. 전시회와 함께 여러 전공들이 모여 논의하던 세미나와 연구는 왜 함께 공부하고 같이 전시하는가의 합목적을 이룬 셈이다. ‘사이덱스CyDEX ’98’도 컴퓨터 응용이라는 디자인 수단에 집중하며, 그 후 조형대가 최고의 CAD 역량을 갖추는 데 줄기세포를 이룬 셈이다. ‘소수Minority를 위한 디자인’도 디자인의 사회성과 합목적에서 실천적인 교육 경험이었다. 건축 전공이 조형대학 전공들과 어떤 부가적 가치를 공유했는지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건축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세련된 표현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타 전 공들과 나누던 공간과 구조의 건축적 이해도 주목할 만하다. 금속-도자 공예가 건축을 모델로 하는 프로젝트도 여럿 보았다. 의외로 의상학과 작품에서 구조화와 공간 구축의 뜻을 활발히 읽는 것이 흥미로웠다. 비록 1학년 기초전공이지만, 전 전공이 함께 학습하던 ‘기초조형’, ‘그린디자인’은 다른 대학교에 가서도 두고두고 자랑하던 시스템이다. 물론 전공과목 교실에서 타 전공학생의 수 강생을 자주 발견한다. 아마 이러한 동지적 교육 환경은 이후 흐려져 갈 것이다. 개인화 되어가는 대학 사회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 설계교육도 대학의 정체성 보다는 교수 개인의 스튜디오가 지향하는 개별성이 지배하여 간다. 조형대학은 올해 40년 불혹不惑의 잔치를 한다. 이 기록의 화두를 ‘통합적 가치의 시대’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불변의 가치인가는 모른다. 이미 분해와 개별의 가치가 더 유려해지는 시대문화를 지나고 있다. 이제 타성이 호시탐탐하는 중년기에 들어서며 새로운 교육철학을 더 자꾸 물어야 할 것이다.
박길룡
건축학부 명예교수

시대정신, 디자인 윤리

  • 새로운 시도
01 조형전

- 국민대학교 조형전
조형대학의 이념과 교육성과는 조형학부 출범 이후 각 학과의 학생작품들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대학 차원의 종합디자인 전시회로 기획된 ‘국민대학교 조형전The Exhibition of College of Design, Kookmin University’을 통해 통합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교생이 참여하는 조형전은, 대학 본부의 전폭적인 지원, 대규모의 종합적인 구성, 교 수와 학생 간의 혼연일체의 열정 등에 의해 대학의 최대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1976년 조형학부 출범과 같은 해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14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각 학과의 출품작들 속에 반영된 새로운 교육 체계와 내용은 국내의 건축, 디자인, 공예 분야의 교육계와 현장으로부터 큰 반향을 이끌어냈으며, 초기의 3년에 걸쳐 계속된 지역 도시 순회전은 조형대학과 국민대학교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조형전의 개최는 조형학부 초기에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고취하기 위한 정규 수업 이외의 자율적 창작학습 프로그램이었다. 교수들은 회의를 거쳐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리고 대학을 가장 빨리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 조형전을 선택했으며, 이를 대학 본부가 수용함으로써 조형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형학부가 출범한 해인 1976년에 부임한 정시화 교수는 조형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형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작품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첫째, 전임교수의 의욕적인 학생지도이다. 정규수업시간 외에 자발적으로 조형전 준비기간 동안 학생들의 작품창작 지도에 몰입하는 일이다. (중략) 조형전 준비기간 동안 학생들과 함께 야간작업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학기 중의 학점중심 교과수업은 원리학습이기 때문에 주어진 학기 안에 완성도 있는 결과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조형전을 위한 수업은 학기수업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배운 원리를 실제사례에 시뮬레이션 해보는 과정까지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성취감과 실력은 당시 타 대학 학생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도 일취월장했다.

둘째, 1970년대의 대부분의 대학은 실습실과 기자재와 관련하는 한 실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민대학은 조형전을 계기로 개인의 작업 공간, 공동 워크숍, 기자재 등은 다른 어느 대학보다 앞섰기 때문에 조형대학의 교육환경은 지금까지 타 대학의 모범이 되고 있다. 현재 조형대학의 건물은 각 학과 학생들의 개인 스튜디오임과 동시에 공동 워크숍, 그리고 작품전시장으로서 종합 디자인 센터가 된 것은 모두 조형전의 컨셉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셋째, 조형전의 발의는 비록 조형대학의 교수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대학본부의 예산지원과 행정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규석 총장이 지원한 조형전 예산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으며, 전적으로 학생들의 작품제작과 조형전 디스플레이를 위해서만 사용되었을 뿐 조형전을 위한 일체의 교수 인건비에는 스스로 그 어떤 예산도 편성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다.”또한 당시 조형학부의 부수언 교수는 조형전에 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형전은 1학기와 여름방학에 준비하고 가을에 오픈했는데, 준비기간에는 디자인 계열 교수들이 대부분 학교에서 생활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갔다 올 정도로 열심히 했다. 조형전 준비 기간에는 학생들도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잠자리는 본인들의 책상 위였다. 마치 군대생활과 같았다. 전시 장소는 미도파 백화점이었는데 많은 학생들과 디자인 지망 고등학생들이 전시회를 보러 왔다. 여기서 힘을 얻어서 지방 순회전을 하게 된 것이다. 광주, 전주, 대구, 부산 등을 번갈아 순회전을 했다, 당시만 해도 지방에서 그러한 전시회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조형전은 계속되었다.”1)

국민대학교 개교 30주년을 기념하며 출범한 1976년의 1회 조형전은 서울, 광주, 부산, 대구, 전주에서, 이듬해의 2회전은 서울, 대구, 광주, 대전, 춘천, 연이어 1978년 3회전은 서울, 광주, 마산, 대구, 청주 등에 연속적으로 개최되면서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당시까지 생소했던 디자인 중심의 조형세계와 창작물을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으며, 지방의 많은 고등학생들로부터 조형대학에 대한 선호도와 지원율을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1년에 개최된 4회 조형전부터는 약 3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장소 역시 서울에 한정되었는데 7회 조형전까지는 한국디자인포장센타 전시장에서, 이후에는 교육현장인 조형대학의 전시장과 실기실을 활용하여 전시회, 학술행사, 공연행사, 고교생워크숍 등의 종합적인 행사로 개최되었다.
출품작은 재학생들의 수업결과물을 위주로 하되, 매 전시회마다 채택한 전시주제를 해석하는 기획 작업을 병행함으로써, 디자인교육에서 요구되는 사회성과 시의성을 반영하고 이를 교육적 콘텐츠로 삼았다. 한국성과 디자인방법론을 부각한 ‘한국인, 한국’ 시리즈(1·2·3회), 환경문제를 다룬 ‘그린디자인’(8회)2), 디지털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Cydex’(9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고취한 ‘소수를 위한 디자인’(10회)3) 등이 대표적인 예로, 이들 시의적 주제에 대한 성찰과 이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디자인의 사회적 공여와 실천적 태도를 고취했다. 2010년에는 해외 최초의 조형전이 북경 칭화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역대 조형전

02 입시제도개혁 - 03 조형실기대회 - 04 열린교육
  • 도전과 확대
01 특성화사업 - 02 BK21사업 - 03 국제교류 -
  • 윤리적 실천
01 그린디자인 - 02 소수를 위한 디자인 - 03 유니버설디자인
  • 미래의 영역
그리고 내일
  • 외부칼럼 | 내가 본 조형대학과 한국 디자인 교육
—행복했던 디자인 교육, 행복을 줄 디자인 교육

학과별 교육 및 성과

  • 공업디자인학과
산업디자인 현장의 발전을 견인해오다
동문 글 | 단 하나의 디자인이라도
  • 시각디자인학과
시대를 읽고 문화를 창조하다
외부칼럼 | 40년의 인연
동문 글 |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 바꾼다
  • 금속공예학과
예술과 디자인 경계에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다
나와 금속공예 그리고 국민대학
동문 글 | 출발선
  • 도자공예학과
한국도자문화의 전통과 현대를 이어가다
나의 도자 조형교육
공방도예가 양성을 위한 여정
동문 글 | 공방 작가로, 교육자로
  • 의상디자인학과
패션문화의 미래가치를 디자인하다
미래의 패션산업을 리드
동문 글 | CREATIVE와 MARKETING
  • 실내디자인학과
실내디자인 분야를 선도하다
실내디자인학과 신설 이야기
동문 글 | 다시 듣고 싶은 수업, 다시 다니고 싶은 학교
  • 영상디자인학과
엔터테인먼트문화를 디자인하다
일곱 번째 학과, 영상디자인학과를 열다
동문 글 | 지금 무척 즐겁습니다
  •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미래 운송수단의 방향을 디자인하다
국민대학교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의 설립
  • AI디자인학과
미래 디자인 방향을 디자인하다
AI디자인학과 분야를 선도하다
AI디자인학과 신설 이야기
  • 건축학과
국제적, 창의적 건축인을 양성하다
건축대학, 조형대학에서 분리, 독립하다

연구50년

대학원

일반대학원

-

디자인대학원

-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

연구소

환경디자인연구소

-

테크노디자인연구소

-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

-

공예문화산업연구소

-

사회문화디자인연구소

-

융합미디어디자인연구소

-

패션테크놀로지연구소

-

휴머나이징모빌리티디자연구소

-

사람50년

교수진의 역사

학생활동

조형대학 학생회

-

학생회의 이름은 ‘낭만’

-

조형대학 동아리 —‘Form’에서 ‘일기장’까지

-

동문의 글

공업디자인학과

-

시각디자인학과

-

금속공예학과

-

도자공예학과

-

의상디자인학과

-

공간디자인학과

-

영상디자인학과

-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

AI디자인학과

-

또 다른 이야기

인생을 바꾼 한국행

-

필연 같은 우연

-

동문이라는 또 다른 인연

-

3남매의 사심 가득한 인터뷰

-

통계와 자료

에필로그 | 반성

KDMW관리자 메뉴얼

사용자 가이드에서 위키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작하기


회차 전시회명 연도 장소
제1회 한국인의 손 1976 미도파백화점 장미홀(서울), 전남일보사 전일

회관(광주), 탑 과학미술관(부산), 동아백화점 비둘기홀(대구), 풍남백화점(전주)|

제2회 한국인의 눈 미도파백화점 장미홀(서울), 홍명미술회관(대전), 동아백화점 6층 화랑(대구), 학생회관 1층(광주), 시립문화관 대회의실(춘천)|
제3회 한국의 조형미 한국디자인포장센터(서울), 학생회관(광주), 학생과학관(마산), 동아백화점(대구), 청주문화원(청주)|
제4회 [[인간의 의지와 생활문화의 창조 ]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전시관 |
제5회 조형전(무제)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전시관|
제6회 조형2000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전시관|
제7회 디자인시대정신 - 하이테크

디자인과 로우테크디자인|| 1990년 10월 15일 ~ 1990년 10월 21일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전시관|

제8회 Green 21 1995년 ??? 원로 언론인
제9회 Cydex'98 2003년 3월 25일 ~ 2003년 4월 2일(사퇴)
제10회 정연주 2003년 4월 25일 ~ 2008년 8월 11일(해임) 동아일보 기자
제11회 이병순 2008년 8월 27일 ~ 2009년 11월 23일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제12회 김인규 2009년 11월 24일 ~ 2012년 11월 23일
제13회 길환영 2012년 11월 24일 ~ 2014년 6월 10일(해임) 공채 프로듀서
제14회 조대현 2014년 7월 28일 ~ 2015년 11월 23일
제15회 고대영 2015년 11월 24일 ~ 2018년 1월 23일(해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제16회 디자인 잇다 2014년 10월 19일 ~ 2014년 10월 29일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제16회 Artificial Natuire 2019년 11월07일 ~ 2019년 7월 16일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제18회 MetaDEx:Meta-Design Experiment 2022년 11월 10일 ~ 2022년 11월 19일 국민대학교 조형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