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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 시각디자인학과</strong><br> | |||
숨어있던 심장 하나가 | |||
1997년은 예기치 않은 IMF가 터진 해이자 내가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한 해이다. 그 여파로 경제는 꽁꽁 얼어붙었으나 내 심장은 철없이 콩닥거렸던 그때,한쪽에서는 스믈스믈 이 시대 슈퍼스타 ‘인터넷’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학년 중간과제로‘교수님에게 이메일 보내기’라는 요상한 과제가 떨어졌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메일 보내는 법을 몰라 헤맸을 정도로 인터넷이 생소한 시절이었다. | |||
그리고 이듬해 가을, 시디과 교수님들은 참으로 기발하고 무모한 발상을 하게 되는데, 그건 막 등장한 최신기술, 플래시를 활용해 웹상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사이버 전시회를 연다는 계획이었다. 1초에 5KB도 받지 못해 작품 용량 100KB를 넘으면 하염없이 로딩바를 쳐다봐야 했던 그 시절, 정말 몇 년 앞선 발상이었다. | |||
그때 플래시라는 툴에 점점 반해가고 있던 나는, 그 찰떡같은 소식을 듣고 덜컥 졸전 준비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조형대 4층 한 구석방에서 몇 대의 컴퓨터와 함께 선배들과 동거동락하며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한 땀 한 땀 마우스를 클릭했다. 나는 선배들이 준 할당량을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오타쿠들이 만든 작업들을 보며 아직 멀었구나 하고 좌절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렇게 속절없이 부딪힌 후에 우린 결국 CYDEXwww.cydex.org라는사이버 졸업 전시회를 전 세계에 오픈할 수 있었다. | |||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난 시공간을 초월하는 소통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내 이름을 건 전시회를 오픈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작업들을 해나갔고 1년 후인 3학년 여름방학, 드디어 나의 첫 번째 전시회 설은아닷컴www.seoleuna.com을 오픈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느낌과 생각들을 플래시 모션그래픽과 인터랙션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사이트였다. 사이트를 오픈하고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던 첫날밤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삶은 이미 예정되었던 길에 들어선 것처럼 흥미로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끌려오기 시작했고 내 속에 이미 숨어 있던 심장 하나가 비로소 뛰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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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LOVE, Nike, 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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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설 은 아</strong> 시각디자인학과 97학번<br> | |||
현 포스트비쥬얼 대표<br> | |||
런던광고제 동상 수상, 2014<br> | |||
뉴욕광고제 금·은·동상 동시 수상 및 심사위원 초청, 2006<br> | |||
깐느 국제광고제 사이버부분 황금사자상, 2004<br> | |||
선댄스 영화제 초청작 선정, 2000<br> | |||
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그랑프리 선정, 1999<br> | |||
그 외 커뮤니케이션 아트, 클리오 광고제, 웨비어 워드 등 총 60여 회 해외광고제 수상<br> | |||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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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포스얼라이언스 2014 송년의 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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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입대를 한 후 제대하여 복학했던 시기는 92년도였고, 이 시기에 당시 중앙도서관 건물을 증·개축하여 모두가 그리던 조형관에 보금자리를 틀었던 시기였는데, 하필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기실을 이사하게 되어 한쪽에서는 공사가, 한쪽에서는 수업이 이뤄지는 전쟁터에서 학구열을 불태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더 고생스러웠던기억은 이때에 학생회장을 맡게 되어 사범대학에서부터 조형관까지 이사를 했던 일이다. 무거운 실기실 책상을 학생 전원이 방학 중에 등교하여 등에 지고 날랐던절대 잊지 못할 고마운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 |||
시각디자인학과를 다니며 가장 큰 기억은 역시 유능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이었다. 디자이너로서가 아닌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강조해주시며 창업의 꿈을 갖게 해주었던 강의 | |||
가 내 인생을 디자이너에서 디자인 기업가로 성장 발전시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4학년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에 “왜 디자이너는 박봉과 철야 등의 힘든 업무 환경을 이겨내 가면서 | |||
창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디자이너가 우리 사회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기존 제도권의 일원으로 머물기보다는 디자이너의 창조력을 바탕으 | |||
로 사업을 펼치고 기업을 설립하여 경영해야 할 것이라는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었다. | |||
인생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선 가장 최고의 기업에 들어가서 그들의 장점이 무엇인지 배우고, 경험하고자 결심한 나는 삼성그룹의 공채 시험에 응시하여 1000:1이라는 당 | |||
시 경이적인 경쟁률을 뚫고 삼성중공업 산업디자인 센터에 입사하게 되었다. 3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관리의 삼성’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당시 삼성의 조직관리 능력과 인재투자에 깊은 감동과 실질적인 교육 투자의 수혜자가 되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입사 당시 회사의 인사 임원께서 신입사원 모두에게 꿈을 물어 보셨을 때 나는 당당히 3년 후 퇴사하여 멋진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라고 말했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퇴사 후 1998년도에 현재의 미디어포스를 설립하게 되었고 3명의 창업자로 시작했던 회사가 2015년 현재 19년의 역사와 100여 명의 직원을 보유한 디지털마케팅 분야의 당당한 리더가 되었다. | |||
<strong>허 승 일 </strong>시각디자인학과 89학번<br> | |||
현 ㈜미디어포스얼라이언스 대표이사<br> | |||
벤처기업대상 국무총리상, 2009<br> | |||
디지털광고 회사 ㈜이노버스 설립<br> | |||
㈜미디어포스 창업<br> | |||
삼성중공업 산업디자인센터 근무<br> | |||
2025년 9월 7일 (일) 16:00 판
시각디자인학과
숨어있던 심장 하나가
1997년은 예기치 않은 IMF가 터진 해이자 내가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한 해이다. 그 여파로 경제는 꽁꽁 얼어붙었으나 내 심장은 철없이 콩닥거렸던 그때,한쪽에서는 스믈스믈 이 시대 슈퍼스타 ‘인터넷’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학년 중간과제로‘교수님에게 이메일 보내기’라는 요상한 과제가 떨어졌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메일 보내는 법을 몰라 헤맸을 정도로 인터넷이 생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시디과 교수님들은 참으로 기발하고 무모한 발상을 하게 되는데, 그건 막 등장한 최신기술, 플래시를 활용해 웹상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사이버 전시회를 연다는 계획이었다. 1초에 5KB도 받지 못해 작품 용량 100KB를 넘으면 하염없이 로딩바를 쳐다봐야 했던 그 시절, 정말 몇 년 앞선 발상이었다.
그때 플래시라는 툴에 점점 반해가고 있던 나는, 그 찰떡같은 소식을 듣고 덜컥 졸전 준비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조형대 4층 한 구석방에서 몇 대의 컴퓨터와 함께 선배들과 동거동락하며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한 땀 한 땀 마우스를 클릭했다. 나는 선배들이 준 할당량을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오타쿠들이 만든 작업들을 보며 아직 멀었구나 하고 좌절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렇게 속절없이 부딪힌 후에 우린 결국 CYDEXwww.cydex.org라는사이버 졸업 전시회를 전 세계에 오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난 시공간을 초월하는 소통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내 이름을 건 전시회를 오픈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작업들을 해나갔고 1년 후인 3학년 여름방학, 드디어 나의 첫 번째 전시회 설은아닷컴www.seoleuna.com을 오픈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느낌과 생각들을 플래시 모션그래픽과 인터랙션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사이트였다. 사이트를 오픈하고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던 첫날밤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삶은 이미 예정되었던 길에 들어선 것처럼 흥미로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끌려오기 시작했고 내 속에 이미 숨어 있던 심장 하나가 비로소 뛰기 시작했다.
설 은 아 시각디자인학과 97학번
현 포스트비쥬얼 대표
런던광고제 동상 수상, 2014
뉴욕광고제 금·은·동상 동시 수상 및 심사위원 초청, 2006
깐느 국제광고제 사이버부분 황금사자상, 2004
선댄스 영화제 초청작 선정, 2000
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그랑프리 선정, 1999
그 외 커뮤니케이션 아트, 클리오 광고제, 웨비어 워드 등 총 60여 회 해외광고제 수상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미디어포스얼라이언스 2014 송년의 밤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입대를 한 후 제대하여 복학했던 시기는 92년도였고, 이 시기에 당시 중앙도서관 건물을 증·개축하여 모두가 그리던 조형관에 보금자리를 틀었던 시기였는데, 하필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기실을 이사하게 되어 한쪽에서는 공사가, 한쪽에서는 수업이 이뤄지는 전쟁터에서 학구열을 불태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더 고생스러웠던기억은 이때에 학생회장을 맡게 되어 사범대학에서부터 조형관까지 이사를 했던 일이다. 무거운 실기실 책상을 학생 전원이 방학 중에 등교하여 등에 지고 날랐던절대 잊지 못할 고마운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시각디자인학과를 다니며 가장 큰 기억은 역시 유능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이었다. 디자이너로서가 아닌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강조해주시며 창업의 꿈을 갖게 해주었던 강의 가 내 인생을 디자이너에서 디자인 기업가로 성장 발전시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4학년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에 “왜 디자이너는 박봉과 철야 등의 힘든 업무 환경을 이겨내 가면서 창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디자이너가 우리 사회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기존 제도권의 일원으로 머물기보다는 디자이너의 창조력을 바탕으 로 사업을 펼치고 기업을 설립하여 경영해야 할 것이라는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었다.
인생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선 가장 최고의 기업에 들어가서 그들의 장점이 무엇인지 배우고, 경험하고자 결심한 나는 삼성그룹의 공채 시험에 응시하여 1000:1이라는 당 시 경이적인 경쟁률을 뚫고 삼성중공업 산업디자인 센터에 입사하게 되었다. 3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관리의 삼성’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당시 삼성의 조직관리 능력과 인재투자에 깊은 감동과 실질적인 교육 투자의 수혜자가 되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입사 당시 회사의 인사 임원께서 신입사원 모두에게 꿈을 물어 보셨을 때 나는 당당히 3년 후 퇴사하여 멋진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라고 말했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퇴사 후 1998년도에 현재의 미디어포스를 설립하게 되었고 3명의 창업자로 시작했던 회사가 2015년 현재 19년의 역사와 100여 명의 직원을 보유한 디지털마케팅 분야의 당당한 리더가 되었다.
허 승 일 시각디자인학과 89학번
현 ㈜미디어포스얼라이언스 대표이사
벤처기업대상 국무총리상, 2009
디지털광고 회사 ㈜이노버스 설립
㈜미디어포스 창업
삼성중공업 산업디자인센터 근무

